재즈 드러머 사상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친 음악인 중의 하나로 기억되는 칙 웹은 1909년 2월 10일 미국 매릴랜드의 볼티모어에서 윌리엄 헨리 웹(William Henry Webb)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이긴 했으나 그는 다리 등 신체 일부에 이상이 생기는 중대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의사는 어린 칙이 그것을 극복하려면 전신을 꾸준히 움직여주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진단을 내렸다. 의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드럼을 치는 것도 그러한 신체적 문제를 풀어주는 데 좋은 치유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이 말이 어린 칙을 드럼에 정진하게끔 만든 셈이다.
그는 재졸라(Jazzola) 오케스트라-존 트루하트(John Truehart) 등이 속해 있던-와 연주하며 실력을 다졌고, 1924년경엔 존 트루하트와 함께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간 칙 웹은 자니 홋지스(Johnny Hodges), 토니 하드윅(Tony Hardwick), 베니 카터(Benny Carter),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등과 같은 당대의 명 재즈맨들과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7살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듀크 엘링턴과 함께 뉴욕의 블랙 바텀(Black Bottom), 패독(Paddock) 클럽 등지에서 공연을 펼치며 경력을 쌓아갔다. 1927년경엔 할렘 스톰퍼스(Harlem Stompers)라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며 그 특유의 정열적인 드러밍으로 주목을 받았다. 비록 그는 악보를 볼 줄 몰랐으나 연주할 모든 곡들을 외우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1931년엔 자신의 이름을 딴 칙 웹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더욱 원숙해진 스테이지를 선보였다. 이 기간동안 이 악단은 스윙재즈의 정수를 연주해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칙 웹의 열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드럼은 당시 뉴욕 재즈계에서 화제 중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우스 밴드’라고 불리우기도 한 이 악단은 샤보이 재즈 레이블사에도 중요한 존재로 기록된다. 베니 카터(Benny Carter), 에드가 심슨(Edgar Sampson), 돈 레드먼(Don Redman), 그리고 트롬본주자 지미 해리슨(Jimmy Harrison) 등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기간이다. 얼마후 그의 악단은 베니 굿맨(Benny Goodman) 악단, 듀크 엘링턴 악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입지를 공고히 했다. 태프트 조던(Taft Jordan), 루이 베이컨(Louis Bacon), 존 커비(John Kirby), 마리오 바우자(Mario Bauza), 루이 조던(Louis Jordan) 등이 악단에 가세해 힘을 실어주었던 것도 이즈음이다.
1934년 칙 웹 악단은 ‘Blue Lou’, ‘Blue Minor’, ‘Stompin’at the Savoy’, ‘Don’t Be That Way’ 등 일련의 곡들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칙 웹의 악단에는 찰리 린튼(Charlie Linton)이라는 인물이 리드보컬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겨우 17세의 어린 여자였던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를 발견하곤 그녀를 보컬리스트로 새로이 기용하게 된다. 그녀는 ‘Are You Here to Stay’와 ‘Love and Kisses’ 등의 곡들을 녹음하며 재즈계에서 착실하게 인기를 쌓아갔다. 2옥타브 반에서 3옥타브 가까이 올라가는 폭넓은 가창력은 이 악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칙 웹의 정열적인 드럼 플레이와 함께 인기의 핵으로 떠올랐다. 칙 웹은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약 60여곡을 녹음하며 스윙 밴드로서의 독자적인 아성을 굳건히 쌓아갔다.
그러나 1938년경부터 칙 웹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연주 및 밴드를 리드하는 데에까지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밴드와 함께 공연 활동을 계속했다. 결국 이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이듬해에 존스 홉킨스 병원에 입원하고야 만다. 엘라 피츠제럴드는 이미 아버지가 병 때문에 죽어 건강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척 웹마저 입원하자 그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A-Tisket, A-Tasket’이란 서정적인 가사의 곡을 발표했는 데, 이것은 후일 빅히트곡이 되었다.
하지만 엘라 피츠제럴드 및 여러 동료 및 후배 음악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칙 웹의 건강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39년 6월 16일 볼티모어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80여대가 넘는 차량들이 참석해 생전 음악계에서의 그의 높은 위상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칙 웹은 뛰어난 재즈 플레이어였을 뿐만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지닌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다. 엘라 피츠제럴드가 처음 그의 악단에 들어올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17살이었고 또 고아였다. 칙 웹은 그런 그녀를 단지 자신의 멤버로 고용하지 않고 자신의 양딸로 받아들여 그녀가 마음 편하게 음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자신의 악단 멤버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적극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
칙 웹은 28인치 베이스 드럼을 통해 당시 그 어떤 스윙 드러머들보다 울림이 크고 깊은 소리를 냈으며 리드미컬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는 하이해트 심벌 연주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스네어와 탐 류의 단순한 드럼 세팅에 카우벨 등을 위시한 여러 장비들을 혼합하기도 했다. 스윙 시대 드러밍의 새 장을 연 파이오니아인 셈이다. 아트 블래키(Art Blakey), 진 크루파(Gene Krupa) 등 당대를 대표하는 거장 드러머들마저 칙 웹의 연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트 블래키의 경우 인터뷰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 드럼 영웅이 칙 웹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글 / 조성진 in changgo.com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DED004&qid=3Koae&q=%C4%A2+%C0%A5&srchid=NKS3Koae
댓글 by haerim — 8월 4, 2009 @ 6:49 am